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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척기 불망비

등록일 2013년11월01일 23시18분
유척기 불망비
 
 다사읍 매곡리 우방아파트 정문 왼쪽 작은 공터에는 3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3개의 비석 중에 오른쪽에 있는 비가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지수재 유척기(知守齋 兪拓基, 1691~1767) 선생의 불망비이다. 비석 앞면에는 겸순찰사유상국휘척기유택만민영세불망비(兼巡察使兪相國諱拓基遺澤萬民永世不忘碑)라 적혀있다.

 유척기 선생은 경기도 용인출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철이고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명악(命岳)이다. 몽와 김창집(金昌集)의 문인으로 숙종 40년(1714) 중광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호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 15권이 전한다.

 선생이 재직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는 당시 순찰사(巡察使)를 겸임하며 경상도(慶尙道)의 장관(長官)으로 종이품(從二品)의 벼슬이었다. 관찰사는 도내의 행정(行政)·사법(司法)·군사(軍事)의 사무를 총괄하고 관하 부윤(府尹)·목사(牧使)·부사(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경상병마절도사(慶尙兵馬節度使)와 경상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를 정례대로 겸임하였다. 고종 32년(1895)에 8도를 폐하고 23부(府)를 둘 때에 폐지되었다.

 원래 선생의 불망비는 다사읍 이천리(伊川里) 선사(仙?)에 있었다. 일찍이 선사지역은 대구에서 성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옛길의 길목으로 다사지역의 교통중심지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았던 곳이었다. 불망비는 선사 나루터 인근에 있었는데 도로가 신설되면서 1960년경에 매곡리 왕선고개 도로변으로 옮겨졌다. 옮겨진 비는 다시 도로공사로 인해 1990년경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선생이 대구에 경상도관찰사로 처음 부임한 것은 영조 2년(1726) 5월부터 영조 3년(1727) 5월까지 1년간이다. 선생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목민관으로 백성의 고통을 척결하고 구휼(救恤)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더욱이 선생의 정성은 여러 고을의 곡물 장부를 외워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은 10년 후  영조 13년(1737) 4월에 다시 경상관찰사로 부임하자 남녀노소가 모두 기뻐하였다 한다.

 대구 중구 남산동에는 상덕사(尙德祠)라는 사당이 있다. 상덕사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이숙 선생과 유척기 선생 두 분을 함께 모시는 곳이다. 조선 500년 동안 대구에 목민관으로써 재직한 분이 500여 명이 되지만 오직 두 분에게만 향사를 받드는 것은 두 분이 가장 모범적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사지역에 선생의 불망비가 세워진 것은 우리지역이 홍수에 취약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더 많은 구율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불망비는 모범적인 역사적 사실을 돌에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사향토연구소장 최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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