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의 인물
신라 때에는 오로지 활쏘기로 인재를 뽑았는데, 고려 광종(光宗)이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게 되었다. 조선 세조3년(1458)에 비로소 대구의 변방(邊方)이었던 다사 지역에서 최초로 대과급제자가 나왔다.
대과급제자의 주인공은 도하(都夏, 1418~1479) 선생인데, 선생은 현재 다사읍 죽곡리(竹谷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가난하였지만 힘써 공부하여 세종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58년 성균관에서 치러진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장원하였다.
도하 선생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시험일까지는 겨우 7일밖에 남지 않아 대구에서 다급하게 상경하여 겨우 당일에 과거장인 성균관 교문(橋門)에 도착하니 날이 밝으려 할 무렵 과장의 문이 벌써 닫혀 과장을 지척에 두고도 다다를 길이 없었다. 선생은 문틈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서 들어가 시험보기를 청하였다. 그 소리가 어좌에까지 통하여 주상께서 특명으로 허락하여 시험을 볼 수가 있었다.
시험의 제목은 시무책(時務策)이었는데, 선생의 답안지가 임금의 뜻에 맞아 장원으로 발탁되어 그날로 즉시 어필(御筆)로 특별히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 성균관 시험장에 구름처럼 가득 채운 제생(諸生)들이 지각한 선생을 지목하여 “저런 사람이 급제한다면 누가 급제하지 못할까?”라며 깔깔거리며 비웃던 모든 유생들이 경탄해마지 않았다.
문장가로 유명했던 대구 출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선생은 도하 선생을 평하기를 “그의 외모는 순수하고 온화하였고, 말씨는 박식하고 전아하였으며, 사람됨은 청렴하고 바르고 강개하여 옛 군자의 풍도를 지녔으니, 우리 고향에 이러한 사람이 있음을 속으로 다행이라 여긴다.”라 하였다.
도하 선생이 문과급제 이후 다사지역에 3명의 문과급제자가 더 배출되었다. 인조 4년(1626) 서재리(鋤齋里)출신 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1598~1650) 선생이 별시병과에 급제하였으며, 인조11년(1633)에 매곡리(梅谷里)출신 백포(栢浦) 채무(蔡楙,1588~1670) 선생이 증광병과에 급제했으며, 효종2년(1651) 서재리(鋤齋里)출신 휘헌(?軒) 도신여(都愼與,1605~1675) 선생이 식년병과에 급제하였다.
다사는 인물의 지역답게 근현대에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다.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구자춘선생은 세천리 출신이며,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최상철 서울대교수는 매곡리 출신이며, 현재 달성지역 국회의원인 이종진의원은 문양리 출신이며, 특허법원 배기열 수석부장판사는 부곡리 출신이다.
향토연구사 최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