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의 봄은 핀다 이병훈 (시인)
“절망 한가운데 우리는 관심을 옮김으로써 살아날 수 있다.
도도히 흐르는 물길만 바라보다간 그 물살에 휩쓸릴 수 있다.
먼 하늘을 보면서 강을 건너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수도권에서도 먼 아랫동네다 보니 쇼킹할 이슈로 생색낸 적도 없고, 한번 준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 절대 순정(?)에 목이 메는, 그래서 득과 실의 판단에도 무딘 그런 우리에게, 온 나라 들썩임의 중심에 섰다. 긴 겨울의 끝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꽃 피고 새 우는’ 달콤한 춘사(春詞)를 그 누구도 꺼내는 이가 없는, 긴 진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쳇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느닷없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일상을 짓누른다. 모두 ‘얼굴 가리고 말을 숨기는 듯한’ 칩거는 상가의 불빛마저 잦아들게 만들었다. 사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春來不似春).
신이 한쪽 문을 닫을 때 다른 한쪽 문을 열어 놓는다고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인간은 항상 닫힌 문만 본다는 것이다. 이는 비극의 탄생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순둥이 인간에게 고질병처럼 따라 다니는 이 절망은 도대체 뭔가! 아마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뼈아픈 자각을 잊지말라는 신의 낙인과 같은 것일 거다. 말하자면 선을 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1) 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절망을 대처하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철저하게 절망에 빠져 절망을 모르거나, 아니면 절망을 절망 아닌 것으로 보는, 같으면서 다른 ‘수용과 극복’의 차이라고 봄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열린 한쪽 문’을 볼 필요가 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밤에 아홉 번 요하(遼河)를 건너면서 천둥같은 물소리에 놀란 일행들이 두려움으로 떨 때, 연암은 한번 물에 빠지겠다는 각오를 하니 성난 물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코로나19’라는 신의 낙인에서 우리는 불완전성을 들춰내어 닫힌 문만 바라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은 생명의 존엄이 달린 이번 사태를 정치적 매커니즘으로 판단, 평가, 호도되는 것은 정말 불완전함을 넘어 어리석음의 광기를 보는 듯하다. 그래서 백성인 내가 슬프고 시민이 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는 절망에서 밝은 곳으로 관심을 옮기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절망이 되어 버린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고, 치환하기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듦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숙명처럼 어둠의 시간을 지나가야 한다. 먼 하늘을 보면서 강을 건너야 하는 것처럼, 칼날 위에 섰을 단호함의 내공으로 이 시절을 당당히 걸어 나가야 한다. 결국, 우리의 봄은 찬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대구시민께 바침)
1) 영화 ‘기생충’에서 ‘선(線)’을 넘는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지만 EBS의 지식채널에서 ‘코로나19’는 인간이 무분별하게 생태선을 넘은 재앙, ‘박쥐의 역습’이라고 한 것을 보았다.
이병훈 시인
약력: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달성문인협회 회장
현대문학수필작가회 회장 (역)
한국낭송문학회 회장
세계문인협회 정회원